
1. 웨스트에그
봄의 끝자락에 웨스트에그로 이사했다. 뉴욕의 증권사로 출근하기 위해서였다. 세를 얻은 작은 오두막 옆에는 대리석 궁전 같은 거대한 저택이 솟아 있었다. 드넓은 잔디밭과 탑을 갖춘 그 집의 주인이 개츠비라는 사실만 알았다.
초여름 밤 바람이 잔잔하게 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마당의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옆집 잔디밭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그가 양팔을 뻗었다. 어두운 바다를 향해 불쑥 뻗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시선 끝을 좇아 건너편 만을 바라보았다.
부두 끝에서 초록색 불빛 하나가 작게 깜빡였다. 너무 작고 아득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점 하나.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사라지고 밤바다만 남았다.

2. 파티
여름 내내 옆집에서는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주말마다 정원에 수백 명의 남녀가 모여들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면 사람들은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초대장을 받고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를 몰고 와서 춤을 추고 마시는 사람들. 정원 구석 테이블마다 주인을 둘러싼 속삭임이 떠돌았다. 그가 전쟁 때 독일 스파이였다는 소문. 한 여자는 그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단언했다.
아무도 주인의 진짜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주인이 누구든 상관없다는 표정들. 사람들은 주인의 돈으로 차려진 술과 음식을 삼키며 수군거렸다. 화려한 웃음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3. 개츠비
공식 초대장을 받고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가 돌아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무조건 안심시키는 기묘한 미소였다. "오랜만입니다, 친구." 그가 나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차에 나를 태우고 뉴욕으로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그가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았다는 고백. 그러나 옥스퍼드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심 어린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가 주머니에서 금속 패를 꺼냈다. 몬테네그로 정부에서 받은 무공 훈장이었다. 뒤이어 대학 시절 친구들과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의 표정에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4. 다시 만나다
비가 쏟아지는 오후 내 오두막 거실에서 두 사람이 마주섰다. 개츠비와 내 사촌 데이지였다. 5년 만의 재회. 남자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비가 그치자 개츠비는 우리를 자신의 대저택으로 이끌었다. 그는 침실 옷장을 활짝 열었다. 영국산 실크 셔츠 수십 벌을 꺼내 허공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줄무늬 셔츠와 산호색 셔츠가 침대 위로 낙엽처럼 쏟아졌다.
데이지가 셔츠 무더기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아름다운 셔츠들을 보아 슬프다는 울음소리. 개츠비는 창가로 다가가 바다 건너를 가리켰다. 만 건너편 부두에 늘 켜져 있던 초록 불빛의 의미를 고백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5. 돈
데이지의 남편 톰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개츠비의 뒷조사를 끝냈다. 무더운 일요일 오후 톰이 차가운 목소리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개츠비의 진짜 사업은 약국 체인이었다. 금주령 속에서 밀조주를 파는 비밀 창구. 길거리 건달들과 손을 잡고 위조 채권을 유통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대저택의 거대한 분수와 대리석 바닥은 범죄 수익의 산물이었다.
모든 소문의 답이 마침내 손에 잡혔다. 세련된 말투 뒤에 숨겨진 어둠. 톰은 멸시 어린 눈으로 개츠비를 비웃었다. 개츠비는 굳은 표정으로 서 있을 뿐 반박하지 못했다.

6. 플라자 호텔
여름의 열기와 무거운 분위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질식할 것 같은 정적에 데이지는 충동적으로 플라자 호텔로 갈 것을 요구했고 스위트룸에서 얼음이 든 잔을 부딪쳐도 숨 막히는 긴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관계를 대놓고 몰아세우는 목소리. 개츠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 아내는 당신을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톰을 사랑한 적 없다고 단 한마디만 하라는 간청. 데이지는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떨었다.
"그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데이지는 한때 톰을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라며 울먹였다.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만은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개츠비의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7. 사고
돌아오는 길의 잿더미 계곡 도로가 아수라장이었다. 정비소 앞 도로에 인파와 경찰차가 엉켜 있었다. 톰의 정부였던 머틀이 차에 치여 숨졌다. 노란색 고급차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아났다는 목격담.
그날 밤 개츠비의 집 앞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를 만났다. 그의 옷자락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는 낮게 속삭였다. 차를 몰았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데이지였다는 고백.
충격을 이기지 못한 데이지가 운전대를 잡았고 사고가 일어났다. 개츠비는 자기가 몰았다고 증언할 작정이었다. 그는 밤새 톰의 집 불빛을 감시하겠다며 정원에 홀로 남았다. 창가 너머로 부부는 식탁에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8. 수영장
이른 아침 공기가 쌀쌀했다. 개츠비는 올여름 한 번도 쓰지 않은 수영장에 물을 채우라고 지시했다. 낙엽이 수면 위로 하나둘 떨어졌다.
그는 노란 고무 튜브를 띄우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집사에게 데이지로부터 전화가 오면 곧바로 연결하라고 일렀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서 남자는 물 위에 가만히 떠 있었다. 정적 속에서 전화벨 소리는 끝내 울리지 않았다.
잿더미 계곡의 윌슨이 정원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쥐여 있었다. 잠시 후 마른 총성이 울려 퍼졌다.
물 위로 작은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붉게 물든 수면 위를 튜브가 천천히 맴돌았다. 정원 잔디밭 구석에 또 하나의 몸이 쓰러져 있었다.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9. 장례식
개츠비가 떠난 뒤 사흘 동안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매주 그의 술을 마시고 춤을 추던 수백 명의 손님은 자취를 감추었다.
데이지와 톰은 짐을 싸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꽃 한 송이나 전보 한 장 보내지 않는 비정함. 교회 목사와 시골에서 올라온 그의 늙은 아버지, 그리고 나뿐이었다.
비가 내리는 묘지에서 관이 젖은 흙 속으로 내려졌다. 파티 서재에서 책을 구경하던 올빼미 안경 사내가 빗속을 뚫고 뛰어왔다. 그는 젖은 안경을 닦으며 탄식했다. "불쌍한 자식." 그것이 화려했던 대저택 주인에게 바쳐진 유일한 작별 인사였다.

10. 초록 불빛
떠나기 전 마지막 밤 텅 빈 저택의 해변 모래밭에 누웠다. 만 건너편 데이지의 부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개츠비는 그 초록 불빛을 믿었다. 해마다 우리 앞에서 저 멀리 물러서는 황홀한 미래.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나아간다.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손을 뻗는다.